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안반데기 유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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‘안반데기’는 떡메를 치는 안반 같은 땅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‘안반덕’의 강릉 방언이기도 하며, ‘안반덕이’라고도 불린다.
한국전쟁 후 미국의 원조양곡을 지원 받아 개간이 시작되어 1965년을 전·후한 시기에 마을이 개척되었으며, 1995년 주민들이 개간된 농지를 불하받으면서 완전히 정착하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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안반데기 역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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안반데기의 행정지명인 대기라는 큰 터가 자리하고 있어 ‘한터’, 큰터’, ‘대기’라 칭하였다고 한다. 조선후기 인문지리지인 「여지도서」에도 ‘대기’가 기록되어 있는데, 이때의 대기리는 구정면 지역이였다. 1916년 20여개의 마을을 병합한 후 대기리라 칭하고 상구정면에 편입시켰다.
대기리는 1917년 면제개혁 때 상구정면이 왕산면으로 개칭되면서 왕산면 관할이 되었으며, 처음엔 3개리였으나 안반데기가 개간되면서 화전민들이 이주하자 안반데기를 대기 4리로 편재하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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70-80년대 ‘안반데기’ 모습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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